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동안구7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동안구7 소개

안녕하세요.
안양호빠입니다.

오늘은 안양호빠와 함께 동안구 평촌동, 귀인동의 동별지명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동안구7

평촌동

민배기(禿朴只, 民伯洞)

삼태기처럼 오목하게 생긴 마을로 벌말과 갈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 과천.인덕원.갈미 등은 관아와 원(院)이 있어 지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데 반해, 이곳은 좀 외진 곳이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는 행려자들이 날이 저물면 민박을 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민박이(民伯洞)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민배기(民伯洞)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원행정는 독박지(禿朴只)로 기술되어 잇는데, 이 는 민배기를 한자화한 표기라고 한다.
즉 독(禿) 은 석독(繹讀)하여 민- 으로 읽어 민배기 로 나타낸 것이다.
괴산 음씨가 처음으로 세거한 민배기마을은 동쪽 지역을 등너머라 칭하고, 그 외 지역은 민배기로 통칭된다.
또 마을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있어 그 서쪽지역은 평촌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었다.

벌말(坪村)

인덕원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없는 허허 벌판에 자리잡고 있어 벌말 (坪村)이라 불렀는데, 그 후 마을이 또 생겨 두 벌말 또는 이평촌(二坪村)이 라 했으며, 이를 줄여 이동리라 칭하였다.
예전에는 한강에서 과천-안양에 이르는 모든 취락 중 가장컸던 벌말은 조선 초기에 괴산 음씨가 최초로 살아 음촌 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그 후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해 왔다.
벌말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서울-과천-군포-남양간 도로를 개설한 후 1969년에 동일방직(평촌동 1)을 비롯하여, 오뚜기식품(평촌동 160), 1982년에 가나안제과(평촌동 81-4)등의 공장이 건립되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지역이 넓어 동북쪽 지역(동일방직 주변)은 웃말 또는 상평촌(上坪村), 서남쪽지역(오뚜기식품, 삼화왕관 주변)은 아랫말 또는 하평촌(下坪村)이라 각각 불렀으며, 이 마을이름으로 인해 1973년 시제가 실시되면서 동명칭이 평촌동으로, 이어 신도시 개발지구 명칭도 이 마을명을 취했다.
장차 안양 시가지의 중심지로 각광받을 미래의 땅이다.

귀인동

신말(新村)동쪽으로, 온양 정씨가 배판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갈 때 이 마을에 들려 머물다 갔다고 하여 귀인(貴仁)이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조 정조 때(1789) 전국의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용을 편찬한 호구총수 戶口總數 에 의하면 귀인이 안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귀인1동, 귀인2동으로 분동해 안양에서는 가장 번창했던 마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귀인강습소 가 있었다가 광복 직후에 이르러 학 생의 감소와 재정난 등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
70여호의 대촌인 귀인마을은 평촌 신도시 개발구역내의 몇 안되는 마을 중의 하나로, 1990년 4월에는 명지대박물관에 의해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석묘가 발견된 곳은 마을 뒷산으로(해발60m)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수목이 우거진 곳이었다.
지석묘는 평촌 자유공원에 이전 복원되어 있으며,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 말엽까지만해도,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 내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마을의 풍요와 무해를 기원 하는 정제(井祭)를 지냈다.

출처 안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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