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10 소개
안녕하세요.
안양호빠입니다.
오늘은 안양호빠와 함께 박달2동의 능골, 삼봉마을, 동수암, 미름물, 웃박달리의 지명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10
박달 2동
능골(陵谷)
범고개마을 서남쪽으로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新村)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초만 해도 안양에서 안산, 소래 등을 가자면 이곳 앞(범고개)을 거쳐야 했으므로 강도.도둑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 남쪽 약 200m 지점의 논 가운데에 섬같이 생긴 큰 무덤이 있어 애능(兒陵)이라 칭한데서
기인하고 있는데, 이 무덤은 1988년에 김모씨에 의해 경지 정리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양시 박달동에 속하나 생활은 이웃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 주민들과 함께 한다.
마을 초입에는 일우주철(박달동 753-11, 1989년에 설립)과 세원화학(박달동 753-9, 1972년에 설립) 등의 공장이 있고,
마을에서는 1970년대 까지 만 해도 범고개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범고개 요골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삼봉마을(三峯洞)
삼봉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1950년대 말부터 비닐하우스 재배가 시작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논 가운데에 큰 산소가 있어 일명 섬마을이라 불렀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산소를 말무덤이라 칭했다.
1970년에 주식회사 삼애기업(박달동 604-1)과 삼신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동수암(東秀岩)
작대들에 소재한 골짜기 중 가장 큰 골짜기에 있던 마을. 고려 때 창건된 동수암사(東秀岩寺)란 사찰이 있었는데, 사찰 주변에
민가가 생기면서 사찰명을 취해 동수암(東秀岩) 이라 칭한다고 한다.
일설에는 옛 시흥군 수암면 동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동수암 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파주 염씨와 광주 이씨 등 15호 남짓한 취락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 일대가 군용지에 편입되면서 폐동되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인근지역인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신촌)과 박달동, 능골로 분산 이주했다.
미름물
샛터말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대동우물을 미름물이라 했는데, 마을명도 우물명을 취해 미름물 이라 칭했다.
이 마을에 세거한 성씨는 최씨, 김해 김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었으나, 일제 때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들어서자 폐동 되었다.
이곳에는 엄성(1575-1628, 응교), 엄황(1580-1653, 영흥부사), 엄정구 (1605-1670, 한성좌윤)등 영월 엄씨 선대의 묘가 많았다.
웃박달리(上博達里)
조선시대 박달동(리)에는 모두 12개의 자연취락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웃박달리였다고 한다.
선녀골 동쪽에 있던 웃박달리는 파평윤씨, 김해 김씨 등 15여 호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참고: 안양시지
출처 안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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