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11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11 소개

안녕하세요.
안양호빠입니다.

오늘은 안양호빠와 함께 박달2동의 붓골, 샛터말, 선녀골, 범고개의 지명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11

붓골(筆洞.富谷)

공군아파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능성 구씨가 배판한 이래 안동 권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등이 세거해 40여호의 촌락을
이루다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軍用地)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농지 또한 비옥해 연연세세(年年歲歲) 풍년이 들자 인근의 사람들이 부자가
많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부골 (富谷)이라 불렀는데, 1930년대 일본인들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붓골 (筆洞)로 개칭되었다고
한다.이 곳에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유명한 구만의 묘와 정려각(族閭閣)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구만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선조때(1591) 사화(士禍)로 사면되었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조랑(天曹郞)
에 임명되었다.이때 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평안도 용만(龍灣)으로 향하던 중,왜병 수천명을 만나 적의 목을 무수히 베었으나 힘이 쇠하여져 적에게 잡힌 몸이 되었다.그러나 적에게 잡혔어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니 왜병은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다.
다행히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시와 남조가 이르기를 구만은 충성과 효성이 지극하니 그 충효는 가히 일월이 서로 빛을 다투는 것과 같도다 라고
상소하여 숙종 34 년(1708)에 정려(族閭)를 내려 이곳(당시의 지명은 금천현 박달리)에 비각을 세웠다.

샛터말(新其村)

조선 중엽에 영월 엄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로 그 후 달성 서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했다.
일제강점기에 군용지가 건설되자 폐동 되었다.
동수암과 붓골 사이에 있었다.

선녀골(仙女谷)

곤두레미고개 밑에 있던 마을로, 이곳 골짜기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리산 낙맥인데다가 습한 곳이라 안개가 많이 생겨,
흡사 선녀가 사는 고을 같다하여 선녀골 (仙女谷)이라 칭했다.
선녀골은 조선조 태종(太宗)의 11남인 후령군(厚寧君)의 묘를 이곳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 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될 만큼 전주이씨령군파가 집성(20여호)을 이루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건설되면서 폐동되었고, 후령군의 묘는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으로 이장되었다.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11 범고개

친목마을 남쪽으로, 박달로변에 위치해 있다.
범고개(虎峴)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고개이름을 취해 범고개 (虎峴洞)라 칭한다.
예전에는 이곳 남쪽 (현재 군용지에 편입됨)에 웃말(上村)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어느 부자가 화재로 가산을 탕진하자 마을을
떠난데 이어, 마을 주민이 범에게 잡혀 죽자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모두 지금의 위치로 이주, 정착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나주 임씨와 안동 권씨로 알려지고 있으며,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의
건설로 안양-안산간 도로가 개설된 후 1972년 동아유리공업주식회사(박달동 620-5)등을 시 발로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다.
마을에서는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2일에 요골초입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참고:안양시지

출처 안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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