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6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6 소개

안녕하세요.
안양호빠입니다.

오늘은 안양호빠와 함께 만안구 안양9동의 창박골(蒼岩洞), 병목안(後頭尾洞)의 지명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6

안양9동

창박골(蒼岩洞)

안양9동 10통에 속한 마을로 병목안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마을 유래는 첫째, 이곳에 많은 바위색이 유독 푸른 심청색(深靑色)이라 하여 창박골(蒼岩洞)이라 불렀고 골짜기를
창암곡(蒼岩谷)으로 칭했다.

둘째, 안양예비군 교육장 서쪽에 큰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에 구멍이 뚫려있어 흡사 창(窓)과 같다하여 “창바위(窓岩)”라
불렀고 이 바위 안쪽을 “창암골” 바깥 골짜기를 “창박골(蒼外谷)” 이라 각각 칭했는데, 이곳에 민가가 생기면서 마을 명칭도
창박골(蒼外谷)로 되었으나 현재와 같이 창박골(蒼岩洞)으로 쓰이기 시작한 연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산 골짜기에 위치한 이곳은 1970년대 병목안, 담배촌 일대가 시민의 휴양지가 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고 이어 1985년
석산연립과 이어 안양서여중이 들어서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마을에서는 음력 7월 1일이면 참박골 앞산(약수터입구)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병목안(後頭尾洞)1

새마을교에서 안양 채석장에 이르는 지역으로, 마을의 지세가 병목처럼 마을초입(새마을교)은 좁으나 마을에 들어서면
골(谷)이 깊고 넓다고 하여 병목안이라 부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수리산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뒤띠미 (後頭尾洞)라 칭했고, 행정규역 명칭으로는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동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후두미동의 두 자는 豆와 頭를 함께 사용하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頭로 통일된 것으로 보이며, 柳氏世譜(1982)에는
후둔(後屯)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두(頭)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병목안에 사람이 최초로 살기 시작한 것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촌로들의 증언과 이 곳에 소재한 묘소 등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조 숙종 년간에 진주 류씨에의해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인조년간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류적(1597-1638)의 둘째 아들인 류명재(柳命才) (1623-1703)의 묘를 이곳에
쓴 후 부터인데, 류명재는 자가 유도(有道), 호가 사재(思齋) 로 통정대부에 올라 안산군수와 영천군수 및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후 81 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 인물이다.

진주류씨의 묘는 류명재외에 류명재의 아우 류명웅(柳命雄,1636-1722, 돈지돈령부사 역임. 1973년에 화장)을 비롯 하여

류명재의 큰 아들, 손자 및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인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처(晋州柳氏) 묘(후에 진천으로 이장) 등이
있었다.

진주류씨 이후 병목안에 세거한 성씨는 원주 원씨, 순창 조씨, 달성 서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병목안을 기점으로
서쪽지역을 새마을, 서남쪽 지역을 창박골, 남쪽지역을 담배촌이라 각각 칭한다.

구전에 따르면 이 마을에 진주 류씨가 부자로 살았는데, 날마다 찾아오는 食客으로 고민하고 있던 차,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그 방도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스님이 이르기를 마을초임(새마을교)산밑에 묘를 쓰고 탑을 세우시오 라고 이른 후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가다고 한다.

병목안(後頭尾洞)2

그 후 류부자의 하인이나 가족이 죽으면 스님이 일러준대로 묘를 쓰고, 그 옆에 탑(돌탑)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렇게 정성을
들이자 과연 류부자 집에 찾아오던 손님(식객)의 발길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진주 류씨가 일거에 패가했다는 것이다.

이는 병목안 동쪽에 있는 뉴골든아파트 뒷산이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므로 산 끝에다 묘와 돌탑 등 무거운 것을
쌓았으니 배가 뒤집혀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새마을교 옆에 있던 돌탑은 손을 대거나 치우면 병목안 주민들이 위해 를 당할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에 그래도 있었다가,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갔고, 묘는 1980년대 초에 대부분 화장되었다.

마을 동남쪽에 있던 안양채석장은 1930년대 초에 개장되었다가 1989년에 폐장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차응설이 이곳에 야학을 세워 문맹퇴치에 헌신 하기도 하였다.

안양3동 15통.17통.18통.24통에 속해있는 병목안에서는, 일제 중엽까지도 창박골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창박골 앞산(약수 터 입구)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참고:안양시지

출처 안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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