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2 소개
안녕하세요.
안양호빠입니다.
오늘은 안양호빠와 함께 만안구 안양2동부터 4동까지의 동별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2
안양 2동
석수동(石手洞.石水洞)
안양유원지 일대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석수동(果川郡 下西面 石手洞)이라 칭했다.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 쌓여있어 석공(石工)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석수동(石手洞)이라 했으나,
1930년대 초에 마을 앞 하천(삼성천)에 석수동 수영장이 개설되면서 석공들이 자취를 감추자 석수동(石水洞)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효성의 다리로 불리워지고 있는 만안교(萬安橋)와 교비(橋碑)도 이 마을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안양시 동별지명유래 만안구2 안양 3동
양지동(陽地洞)
안양공고 주변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3동 1.2.3.4.6.25.26.27통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제 2대 정종의 7남인 수도군(守道君)의 증손 이공(지제부수) 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이래 원주 원씨 등이 세거했다.
이 마을 명칭 에 대하여 양지(陽地), (陽智), (陽知), (陽至)등 문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양지동(陽地洞)이라고 표기함이 옳다.
이곳은 1928년에 지금의 안양3동 부근에 안양산업사(安養産業社)란 안양 최초의 공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직전에는 아사이학교가 설립 되었고, 광복 직후에는 안양중학교(1948), 안양공고(1949)등 많은 학교가
운집되어 있어 안양교육의 요람지로 변모되었다.
양지동은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 김대규(金大圭1942- )의 출생지이며, 방송작가 이서구(李瑞求1899-1981),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4-1950), 시인.평론가 정귀영(鄭貴永 1917- ), 시인 성기조(1934- )등 문인들이
오랫동안 이곳에 살며 문학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채만식은 전북옥구 출신으로 동아일보.조선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1925년 단편 세길로 조선문단지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뷰했다.
태평천, 허생, 아름다운 새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1938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탁는 그의 대표작으로
현실을 비판하여, 풍류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는 평가 를 받고 있다.
채만식이 양지동에 이사와 살기 시작한 것은 1940년으로 그는 이해 6월 5일부터 8일까지와 6월 10일부터
11일까지 6일간 매일신 보에 안양복거기 安養卜居記를 발표했다.
그 후 이듬해 3월에 양지동을 떠나 서울 광장리로 이사했다.
안양 4동
장내동(墻內洞.澹安)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장내리라 칭했던 마을로,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원주 원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 이라 부르고 있다.
1961년 11월 6일 안양1동 소재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이전되면서 상권이 형성됨과 동시에 중앙로의 개통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오늘날에는 안양최대의 번화가로 변모되었다.
출처 안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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